도연명도 역시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당시의 혼란한 정치현실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시에서 밝힌 바와 같이 ‘本性愛岳山, 質性自然’의 성격을 좇아, 자연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대부분 시인들은 혹시 남들이 자신의 시를 쉽게 알아볼까 두려워 시를 어렵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도연명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비통한 심정을 ‘재주를 품었으되, 그 재주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라는 의미의 ‘회재불우(懷材不遇)’로 표현하기도 했다. 불우했던 숱한 지식인들은 난세의 간웅(奸雄)에게 기대어 미처 피어나지도 못할 재능을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도연명은
도연명)陶潛(도잠)
‘潛’- 陶淵明 자신의 심정, 당시 방황하던 사회의 분위기 상징
陶淵明의 생애
陶淵明(365~427) – 이름은 潛이고 자는 元亮(원량)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명장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孟嘉)였다
그로 인해 청소년들은 독자적인 사고·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이때 부모의 지혜로운 대처로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청소년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바르게 발달할 수 있게 된다.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자신의 발달단계에서의 과업수행에 따른 욕구 불만이
양무제는 즉위 초에는 명군으로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으며 남조시대 불교를 공전의 전성 시대로 만들어 황제 보살로 불려지기도 하였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부정 부패를 막지 못해 자신은 물론 국가까지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 육조시대의 유교
1) 유교시대의 유학자
(1) 부현(傅玄)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도덕이 완전히 무너지고 천자를 살해하는 난신, 적자들이 많았다. 사회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심이 염세적 사상으로 젖어 들게 되었다. 따라서 불교가 이러한 경향을 타고 점점 깊숙이 보급되었다. 남북조 시대에는 불교가 왕왕 군주의 존경과 신임을 받아 정치적인 세력을 얻기도
이는 이 시에 등장하는 어부는 당시의 隱士(은사)였다고 전해지나 사실은 굴원이 이러한 인물을 假設(가설)하여, 자기의 절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굴원 자기 자신의 글인지도 확실치 않으며, 아마도 굴원에 관한 傳誦(전송)을 후세 사람이 그의 작품 집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